14 동양최대의 목조건축 동대사



 세계 최대 목조 건축물, 세계 최대 청동 불상이 있는 곳, 일본 화엄종의 대본산, 나라 7대 사찰[각주:1] 중 최고의 사찰. 나라현 나라공원에 위치한 동대사(도다이지)의 수많은 이름들입니다. 멀리서봐도 어마어마한 규모가 느껴지는 동대사는 세계 최대의 목조 건축물로 유명합니다.

 728년 쇼무 일왕이 어린 나이에 죽은 태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기쇼센지를 지었습니다. 그 당시 일본은 재해와 전염병이 계속 되어 백성들이 크게 고통받았는데, 일왕은 이를 위해 전국 각지에 고쿠분지[각주:2]를 짓도록 하였습니다. 기쇼센지는 전국의 모든 고쿠분지의 수장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이 당시 천연두가 창궐하고 자연재해가 계속되었으며, 연이은 흉작가 반란등으로 시대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기쇼센지는 승려들을 관리하는 절로 지정되어 6종[각주:3]의 승려들을 관리하는 국가 중앙 사원의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기쇼센지에서 수계를 받은 승려만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후에 불교의 중심이 기쇼센지의 6종에서 천태종중심으로 이동하게되면서 기쇼센지의 권위가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도다이지의 기록에 따르면, 도다이지의 청동불상과 대불전(다이부츠덴)을 건설하는데는 260만명의 기부 혹은 조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16m가 넘는 세계 최대의 청동 불상인 도다이지 청동불상을 만들기 위해서 3년 넘게 8번의 주조를 하여 만들어졌고, 거대한 크기 때문에 불상의 각 부분을 따로 주조되어 조립하였습니다. 751년 불상이 완성되었고, 752년 기념식에는 무려 만명의 사람이 참석했다고 합니다. 청동불상을 만드는 데에 사용된 청동의 양이 당시 국가에서 사용할 수 있는 대부분의 청동양과 맞먹었고 이로 인해 당시 일본 왕실의 재정이 파탄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힘든 시대를 끝내기 위한 종교적 의미로 시작된 청동불상의 제작에 오히려 국가재정이 파탄나다니 참 아이러니합니다.

 현재 도다이지의 상징인 세계 최대의 목조 건축물인 대불전은 화재 후 1709년에 재건된 것입니다. 현재 도다이지는 길이 57m, 너비 50m, 높이 47.5m를 자랑하는데, 화재 이전에 비하면 현재의 도다이지가 30% 더 작다고 합니다. 현재도 세계 최대의 크기를 자랑하는데, 기존의 모습은 더 컸다고 하니 실로 놀랍습니다.


도다이지의 정문인 남대문 (현판에는 대화엄사라고 적혀있습니다.)은 12세기말 송나라 건축양식으로 재건되었습니다. 남대문에는 2개의 금강역사상이 있는데, 이는 일본의 유명 불상 조각가 운케이와 가이케이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도다이지의 규모에 맞게 남대문또한 거대하며, 금강역사상도 8.5m의 크기를 자랑합니다.



 도아이지의 정원은 전부 다 계획적으로 설계되었으며, 도다이지의 일부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정원의 호수와 도다이지의 중문이 보입니다.

 중요문화재인 중문입니다. 중문에서 입장권을 구매한 후 금당인 대불전으로 갈 수 있으며, 중문의 중심에는 악귀를 쫓고 축복을 비는 향을 피우고 있는 향로가 있습니다. 금당에 가기전에 중문에서 향의 연기를 맞으며 몸을 정화한 후에 금당으로 입장합니다. 중문의 양 옆으로는 회랑이 연결되어 있으며, 이 회랑은 대불전을 감싸고 돌아가 그 뒤에 서있는 북중문의 좌우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도다이지의 가람배치를 설명해드리고 지나가겠습니다. 남대문을 들어서 좌우에 탑원을 두고, 남중문의 좌우측으로 회랑이 북중문으로 연결됩니다. 금당인 대불전이 중심에 위치하며, 금당의 북쪽에는 강당이 배치되어있습니다. 강당에 앞에는 종루와 경루가 있으며, 강당 주위로 승방이 있습니다. 이런 형태의 도다이지의 가람배치는 당시 일본에서 가장 큰 규모의 가라요 시치도가란(당양 칠당가람) 배치입니다.

 도다이지의 금당인 대불전입니다. 위에서 설명한대로 세계 최대의 목조건축물 답게 엄청난 규모를 자랑합니다. 도다이지는 당시 일본 불교의 상징이자 자랑이었고, 이를 위해 매년 현재의 축제와도 같은 불교행사를 열어 아시아 각 국의 승려들을 초대했습니다. 바닥을 보면 대불전으로 향하는 길에 깔린 돌이 다른 종류로 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중심에 검은색 돌은 인도, 바로 옆 양쪽에 붉은 색을 띄는 돌은 중국, 세번째에 있는 연한 회색의 돌이 한국, 마지막으로 양쪽의 넓은 길에 대각선으로 깔린 돌길이 일본을 상징했으며, 이 4국의 승려들은 이 길을 따라 행사에 입장했다고 합니다. 


도다이지의 청동 등롱이 대불전의 앞을 지키고 있습니다. 일본의 청동문화는 대단히 발달했습니다. 이 당시에는 동판 작업의 기술이 거의 완성되어 완벽해졌으며, 등롱의 음각 보상당초문을 보면 당시 일본의 청동기술이 얼마나 발달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도다이지의 건물과 미술품들을 보면 알 수 있는 점이 있는데, 바로 일본이 목조와 청동기술이 발달한데 비해 석조기술은 매우 부족했다는 점입니다. 각 나라의 문화와 자연환경에 따라 알맞는 재료가 발달하기 마련인데, 일본은 중국과 한국에 비해 목조와 청동이 잘 발달한 것이 특징입니다.


 대불전 내부에 있는 도다이지의 상징과도 같은 청동대불입니다. 청동대불은 높이 16m, 무게 425톤의 세계 최대의 청동불상으로 나라 불교의 상징입니다. 한 나라의 국가 재정이 파탄날 정도의 어마어마한 양의 청동이 들어간 불상이라 크기가 정말 상상이상으로 거대합니다. 725년에 이렇게 거대한 청동대불을 만들게 된 배경에는 위에서도 설명했듯, 나라의 어지러움을 막기 위함과, 동시에 일본 불교의 발전과 위상을 알리기 위한 과시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시의 순수한 일본의 기술력으로는 청동대불을 만들기 어려웠는데, 청동대불에는 백제계 도래인[각주:4]의 역량과 기술이 농축되어 있었습니다. 도래인 중 행기스님이 도다이지와 청동대불의 건립의 큰 힘을 썼고, 승려의 최고직인 대승정까지 올랐습니다. 도다이지내에는 행기스님을 기리는 행기당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행기스님은 끝내 청동대불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청동대불과 도다이지를 비롯하여 도다이지 내부에 있는 조각들까지도 도래인들의 기술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역사적 측면에서 객관적으로 보면 도래인은 한국인은 아닙니다. 도래인이 일본에 건너가 도다이지와 청동대불의 기술력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고, 이는 한일 건축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고 의미를 지니지만, 역사를 객관적으로 봐야합니다.[각주:5]

화재와 지진으로 인해 소실이 많아서 다시 제작을 많이 했는데, 청동대불의 머리 부분은 에도시대에 새로 만들어졌고, 위 사진에 보이는 손 부분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다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번 14번째 이야기 동양최대의 목조건축 동대사편에서는 동대사의 건축 소개와 도래인에 대한 이야기를 해봤습니다. 도래인에 대해서 글을 쓰면서 다시 한 번 느낀 것이지만, 역사는 객관적으로 봐야할 것 같네요. 이번 글도 마당 손님들에게 좋은 정보를 제공하고 잠시 고민해 볼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됐으면 합니다.




  1. 남도 7대사 (나라 7대 사찰) : 과거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 헤이안쿄로 이전하기 전 수도였던 나라가 교토보다 남쪽에 있다하여 남도라했습니다. 남도 7대사는 나라에 위치한 영향력이 크고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는 7 곳의 사찰을 뜻하는데, 도다이지, 다이안지, 간고지, 호류지, 고호쿠지, 사이다이지, 야쿠시지를 칭합니다. 일부 사학자들은 호류지가 정확히는 나라시가 아니라 이코마군에 위치하고 있다하여 호류지 대신 도쇼다이지를 넣기도 합니다. 하지만 호류지 또한 나라권에 위치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호류지를 포함해 남도7대사라고 합니다. [본문으로]
  2. 國分寺. 나라 시대에 국과 백성의 평안을 기원하며 국가에서 지은 절을 뜻합니다. [본문으로]
  3. 당시 나라의 6개의 불교종파로 법상종, 성실종, 율중, 삼륜종, 구사종, 화엄종이 있었습니다. [본문으로]
  4. 한반도 혹은 중국대륙에서 4~7세기경에 일본으로 이주한 사람들을 듯하는 말입니다. 특히 백제계 도래인, 신라계 도래인, 가야계 도래인은 일본에 선진 문물을 많이 전파하였으며, 정치, 경제, 미술, 건축, 예술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도래인의 대부분은 한반도에서 건나간 사람들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백재계가 많았습니다. [본문으로]
  5. 본 내용은 유홍준 일본 속 한국을 걷다 라는 다큐멘터리에 자세히 나옵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도 도래인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는 중요하지만, 객관적으로 봐야하며, 도래인의 역사를 한국의 역사로 취급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합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