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금각사와 은각사

 8번째 이야기 신사에서 태어나서 절에서 잠들다부터는 종교건축과 교토의 전통건축물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가는 중입니다. 이번 10번째 이야기에서는 교토의 상징적인 건축물인 금각사와 은각사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금각사와 은각사는 위치는 조금 떨어져있지만 이름 때문에 많은 분들이 두 건물의 관계에 대해 궁금해 합니다. 심지어 일본어 발음도 킨카쿠지와 긴카쿠지로 거의 비슷합니다.


 우선, 키타야마 문화의 정점 금각사를 살펴보시겠습니다.



 199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일본이 자랑하는 전통 문화유산인 금각사입니다. 정식명칭은 로쿠온지 (鹿苑寺 )이지만, 금박으로 덮힌 화려한 모양때문에 애칭인 금각사 (킨카쿠지)로 더욱 알려져 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도 킨카쿠지 Kinkaku Ji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일본 교토에 있는 사원으로, 무로막치 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츠의 별장으로 건립된 건물입니다. 

 잠시 일본의 시대에 대해서 짧게 설명드리자면, 1936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가마쿠라정권을 무너뜨립니다. 1936년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집권 이후 오나 노부나가에 의해 막을 내리기까지의 240년을 무라마치 시대라고 합니다. 이후, 모모야마-에도-메이지-타이쇼-쇼와-현재인 헤이세이 시대로 이어집니다.

 교토는 오랜기간 일본의 진짜 수도였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일본은 수도를 정해놓지 않은 국가로, 사실상 도쿄가 수도지만, 간사이사람들은 교토가 진정한 수도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무로마치시대에는 일왕과 쇼군이 동시에 교토에 집권해 있어서 교토가 진정한 수도로 막대한 권력을 가졌습니다. 나중에 도쿠가와 가문이 에도시대에 에도 즉 도쿄로 천도하기 전까지 교토가 진짜 수도였습니다.

 무로마치 시대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는 자신의 위상을 과시하기 위해 별장을 짓습니다. 바로 위에서 설명드린 금각사입니다. 무로마치 막부 시대에는 일본 전통의 사무라이 무사도 정신과 유입된 선불교가 결합되어 새로운 사조가 발달합니다. 14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전반까지 약 100여년간 키타야마(北山) 문화와 히가시야마(東山) 문화라는 문화사조가 엎치락 뒤치락 잇달아 나타납니다. 



 2층과,3층을 뒤덮은 금박, 그리고 바로 앞에 위치한 수공간때문에 아름답게 비치는 금각사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금각사는 아시카가 요시마츠가 은퇴 후 별장으로 사용하던 금각사는 그의 아들이 린자이 학파의 선불교 사원으로 변경시키면서 사원이 되었습니다. 1467년 무로마치 막부의 최대 혼란기인 오닌의 난이 일어나면서 금각사는 수차레 연소되었다가, 1950년 7월 2일 정신병을 앓던 금각사의 수도승이 방화하여 대부분이 소실되었고 1955년 다시 세워졌습니다.

 금각사는 일본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건물 중 하나이며, 수학여행의 단골 코스로 여러가지 매체에서도 등장합니다. 미시마 유키오의 유명 소실인 금각사의 주 배경으로 등장하는데, 소설 금각사의 주된 사건이 바로 1950년 있었던 금각사 방화 사건입니다.

 다시 건축 이야기로 넘어오면, 금각사는 선불교의 사원이었던 만큼 불상과 선대 스님들의 사리를 모시는 누각으로 사용되었습니다.물과 면해있는 바닥층을 제외하고 2층과 3층은 금박으로 뒤덮어 불교의 상징색인 금색을 표현함과 동시에 아시카가 요시미츠의 권력을 과시하는 화려한 장식으로 사용되었고 금각사의 지붕에는 황금색 봉황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3층짜리 누각인데 세 층의 건축양식이 모두 다르다는 것입니다. 1층의 양식은 요시미츠의 별장으로 사용되려던 만큼 왕조 귀족의 건축 양식을 엿볼 수 있는 신데즈쿠리양식을 사용했습니다. 신덴즈쿠리는 방의 구분을 하지 않고 거대한 공간을 천을 이용해서 나눈 후 앉는 자리에만 다다미를 까는 양식으로 넓은 공간을 만들 수 있어 왕조와 귀족들이 즐겨사용했던 양식입니다. 2층은 가마쿠라 시대의 무사들의 취향인 화요 건축의 불당 양식이며, 3층은 중국 당나라 양식을 차용하여 선종 양식으로 독창적으로 절충했습니다. 중국의 양식을 가져온 것은 무로마치 막부시절 중국과 활발한 교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1층은 기본시설로 침전과 거실이 있으며 2층에는 관세음보살 상을 모셔두고 3층은 불전으로 사용했습니다. 



 금각사가 은은하게 비치는 경내의 모습이 특히 고요하며 아름답습니다. 이 고요하고 아름다운 금각사의 경내는 극락정토를 표현하기 위한 노력으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금각사는 앞에서도 언급했듯, 이 시기를 대표하는 두 문화사조 중 하나인 키타야마 문화를 대표하는 건축입니다. 키타야마 문화는 금각사를 대표로 하여, 전통예술 공연등으로 대표됩니다. 신사예능에서 부터 발전한 전통예능으로 신사예능이란 신을 모방하는 연극이나 춤등을 뜻합니다. 현대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신사예능으로는 신사예능 카구라의 한 부분인 시시가구라 즉, 사자춤이 있습니다. 키타야마문화는 가무와 연극을 중심으로 발전했습니다. 특히 키타야마 문화를 대표하는 예능은 노동요나 신사예능으로 신을 모방하거나 노동을 즐겁게 하기 위한 춤과 음악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이제 히가시야마 문화의 정점 은각사로 넘어가보겠습니다.




 두번째로 살펴 볼 건물은 히가시야마 문화의 대표인 은각사입니다. 은각사의 정식명칭은 히가시지쇼지 (東山慈照寺) 입니다. 할아버지인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세운 금각사를 모방하여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1406년 은퇴 후 살 별장으로 지었습니다. 원래 이 곳은 헤이안시대에 정토사가 있던 곳이지만, 오닌의 난으로 소실되고 요시마사가 별장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요시마사는 은각사의 완성을 보지못한 채 사망했습니다. 실제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무로마치 막부 역대 가장 무능한 쇼군으로 묘사되며 이 시기에 오닌의 난 때문에 가장 혼란스럽고 불안했으며 재정적으로도 가장 위태로운 상태였습니다.

 은각사라 불리는 사진 속 관음전은 요시미츠의 금각사를 모방하여 규모는 작지면 형태는 거의 유사하며, 요시마사가 생전에 좋아하던 절인 사이호지도 많이 모방했습니다. 하지만 은각사라는 이름과 다르게 은칠이 안되어있어서 처음 본 관광객들이 많이 당황한다고 합니다. 실제로는 은으로 칠할 예정이었지만, 요시마사가 일찍 사망한 이유도 있으며, 오닌의 난으로 당시 무로마치 막부는 최악의 시기였기 때문의 재정적 문제도 겸해 은칠 대신 옻칠로 마무리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설로는 히가시야마 문화의 고요하고 절제된 것을 좋아하는 문화 때문에 화려한 은이 아닌 옻으로 대체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은각사의 내부는 금각사의 양식과는 조금 다릅니다. 금각사가 1층에 신덴즈쿠리 양식을 사용한데 비해, 은각사는 1층에 쇼인즈쿠리 양식을 사용했습니다. 쇼인즈쿠리는 방 전체에 다다미를 깔고 문을 이용해 공간을 나누는 양식으로 현대에도 사용중인 일본 전통 실내구조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양식입니다. 또한 쇼인즈쿠리양식의 유래는 승려들이 독서하던 공간이었습니다. 때문에 쇼인즈쿠리양식은 실내 채광을 위해 벽에 창문을 만들고 선반을 만들어 독서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두고, 도코노마와 지가이타나를 설치했습니다. (도코노마는 일본 주택에서 바닥을 한 층 높게 만들고 벽에 족자를 걸고 바닥을 꽃과 장식물로 꾸며놓은 곳으로 장식과 종교적 용도로 만듭니다. 지가이타나는 두 개의 판자를 아래위로 어긋나게 만든 선반을 말합니다.) 금각사와 마찬가지로 2층에 1층과 다른 건축양식을 사용했는데, 은각사의 2층은 금각사와 마찬가지로 선종양식을 사용했으며, 관음보살을 모시고있습니다.

 히가시야마 양식의 특징은 고요와 절제입니다. 마당에서 한중일의 정원을 소개하는 글을 썼었는데요, 그 글을 읽어보시면 일본 정원의 특징을 아실 수 있는데, 그 특징의 유래와도 같은 것이 히가시야마 양식입니다.



 모래와 돌로 후지산을 형상화한 가레산스이 정원이 그 대표적 특징인데, 일본정원의 특징중 하나인 절제와 비유를 통한 자연환경의 표현이 은각사의 정원 가레산스이에 잘 나타나있습니다. 대표적 일본정원인 가레산스이와 수수한 누각, 소나무로 꾸며진 정갈한 정원과 나무들로 만들어진 담벼락등이 히가시야마문화의 고요하고 절제된 미학을 잘 보여줍니다. 키타야마 문화과 춤과 음악으로 발전했다면, 히가시야마 문화는 공간양식과 꽃꽃이, 미술등의 조용하고 정적인 분야로 발전했습니다. 






 이상으로 키타야마 문화의 금각사와 히가시야마 문화의 은각사를 살펴보셨습니다. 비슷하면서도 키타야마는 동적이고 히가시야마는 정적인 특징이 있었습니다. 무로마치 막부 시대의 쇼군의 권위를 위해 지어진 별장들이면서 동시에 후에 선종 사원으로 변했다는 공통점까지 있어서 더욱 인상적이었네요. 한편으로는 유능한 쇼군이었던 요시미츠와 최악의 쇼군이라 불리는 요시마사. 어쩌면 무능했던 요시마사는 너무나 유능했던 할아버지를 동경해 그의 별장을 따라지은건 아닐까요 하는 생각이 듭니다. 비슷한점이 많은 건축이지만 그 속을 깊게 들여다보시면 전혀 다른 두가지 문화를 대표하기도 합니다. 여러분들도 건축물을 보실 때 한 발자국 더 깊게 들여다보시는건 어떨까요? 그 속의 문화와 시대 역사까지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