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로 볼 곳은 오사카성입니다. 수많은 건물들이 있고 자연지형지물이 있지만, 당연 오사카의 랜드마크하면 오사카성이죠.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을 뽑을 때는 당연 히메지성을 최고로 뽑지만, 일본 3대 명성을 뽑을때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던 오사카성과 함께 구마모토성, 나고야성을 뽑곤 합니다. 이 여행기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여행지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글인만큼, 오사카성 여행 후기가 아니라 오사카성의 역사적 의의나 건축적 특징들을 이야기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이 우물에 적군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암살하기 위해 독을 풀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를 미리 눈치채고 우물에 황금을 넣어 독을 해독하여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영리하고 대단하다고 해야할지... 아니면 차라리 이 때 그 독을 마셨으면 우리나라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지 않았을텐데요... 참 만감이 교차합니다. (중략) 자 오사카 성을 다 둘러보았는데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인들에게는 최고의 영웅이지만, 우리나라에게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최대의 적이죠. 참 만감이 교차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근본을 알아야 하고 역사공부를 잘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가수 윤하양을 좋아해서 여행떠나기 전에 몇번이고 돌려본 윤하, 일본을 담다라는 프로그램의 마지막편에 나온 장면입니다. 윤하와 친구들이 오사카성을 구경한 후 저런 말을 합니다. 참 신기하죠... 역사란 상대적입니다. 과거에 있었던 사실이지만 사실 객관적이지 않은 것도 맞구요.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장군이 없었으면... 임진왜란이 없었으면 조상들이 그렇게 많이 희생되시지 않았을텐데... 조선이 큰 피해를 입지않았을텐데... 하는 생각도 들고, 혹시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없었어도 또 다른 장군이 우릴 공격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들고... 아무튼 역사란 것은 예상할 수 없을만큼 사소한 일로 크게 변하기도 하고, 일본인들에게 영웅인 도요토미가 우리에게 최대의 적인 것 처럼 상대적인거죠.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오사카성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매우 관련이 높은 성이기 때문입니다. 간혹 여행이 아닌 단순 관광을 즐기거나 어린 학생들이 공부없이 여행을 즐기면서 오사카성을 보고왔으면서 도요토미가 누군지도 모르거나,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분들도 계시더군요. 이 여행기의 목표는 여행 전후에 공부를 통해 여행에 즐거움에 배우는 즐거움을 더하자는 것이니까요
오사카성에 도착하면 오사카성을 감싸고 있는 소토보리 (바깥 해자)를 볼 수 있습니다.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방어체계로 깊이 6m 폭 75m에 이릅니다. 이 해자에 물을 채워넣어 적의 침입을 막았습니다. 해자를 넘으면 24~32m 높이로 쌓은 오사카성의 담벼락으로 인해 적의 침입을 막기 용이했습니다. 1
오사카성으로 들어가는 정문인 오테몬입니다. 오테몬은 고려문 (코라이몬)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한반도로부터 전래된 방식을 이용해 지은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고려문양식은 두번째 사진에서 보이듯 문의 뒷면에 양쪽 문가에 보강 기둥을 만들고 그 기둥을 지붕으로 덮어 장식하는 양식을 말하는데,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전파되어 유행되기 시작했습니다.
해자와 정문인 오테문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오사카성으로 들어옵니다. 이제 본격적인 오사카성의 건축과 역사로 넘어갑시다. 오사카성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시대까지 사용되던 오사카의 성입니다. 긴조 혹은 오자카성이라고도 불리다가 근대에 들어와 오사카의 표기가 오사카로 개정되면서 오사카성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도요토미 정권의 본성으로 권력의 중심으로 있다가 도쿠가와 막부가 도요토미 막부를 멸망시킨 오사카 전투당시 소실되었습니다. 에도시대에 접어들어 오사카성을 재건시켰고 그 후 서일본의 거점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83년 축성을 명하여 오사카성을 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5층으로 된 천수각을 건설하고 화려한 금박을 입혀 도요토미 가문의 권력을 과시했습니다. 이후 도요토미가문은 천수각을 조금씩 확장시켰고 오사카성 주변으로 해자를 만들어, 권력과시뿐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최고의 방어력을 가진 성으로 발전시켰습니다. 후에 도요토미에게 흡수된 규슈지방의 패자인 오오토모 가문의 오오토모 소린은 오사카성을 '오사카성은 가히 삼국무쌍이로다'로 표현하며 오사카성이 미적으로도 매우 화려하며 군사적으로도 대단한 성임을 극찬했다고 합니다. 히데요시 사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오사카성을 이어 받아 가문을 지휘했습니다. 2
1614년부터 1615년까지 일어난 오사카 전투당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문은 겨울과 여름에 나누어 31만 4천명의 군대를 이끌고 오사카성을 침략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7만 3천여명의 반밖에 안되는 군사로 도쿠가와에 맞서 싸웠습니다. 당시 도쿠가와 가문의 압도적인 승리가 예상되었으나 도쿠가와 가문은 오사카성의 해자조차 넘지못했습니다. 상황이 안 좋았던 도요토미 히데요리측과 해자를 넘지 못한 도쿠가와측 모두 피해가 컸으므로 오사카성의 해자를 메우는 조건으로 휴전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해석차이로 도요토미측은 외부해자만을, 도쿠가와측은 모든 해자의 폐쇄를 주장했고, 해자가 메워지자 도요토미 가문은 도쿠가와 가문을 막지못해 멸망했습니다.
오사카전투로 인해 일본의 패자였던 도요토미가문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본격적인 도쿠가와 가문의 시대가 찾아왔습니다. 도요토미 가문의 멸망과 함께 소실된 오사카성도 1620~1629년 도쿠가와 히데타다에 의해 재건되었습니다. 도쿠가와 가문은 도요토미 가문의 색을 지우고 도쿠가와 가문의 위세를 자랑하기 위해 천수각을 더욱 확장해 현재의 모습처럼 확장했으며, 중요한 거점으로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자주 화재로 소실되었고 1665년 낙뢰로 천수각이 소실되었습니다.
(4층까지는 도쿠가와를 상징하는 흰색, 5층은 도요토미를 상징하는 검정색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은 오사카성을 폐쇄하여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고 육군 부지로 사용했습니다. 육군 사령부를 지었고, 오사카 동쪽에 병기공장을 지었습니다. 군사시설로 지정되어 오사카성은 미군의 공격목표가 되었고, 많은 건축물들이 소실되었습니다. 1931년 천수각을 새롭게 복원했지만, 겉모습만 그대로일뿐 건축구조를 철근콘크리트로 복원했습니다. 현재 재건된 천수각은 도요토미 시절이나 도쿠가와 시절과는 위치도 모습도 다릅니다. 그래서 1~4층은 도쿠가와 가문을 상징하는 흰색 벽으로 칠했고, 5층은 도요토미 가문을 상징하는 검은 벽에 금박으로 호랑이와 두루미의 그림을 그려넣었습니다. 1995년에는 다시 한 번 보강공사가 이루어져 내부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분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네요. 이러한 보수공사는 현대사회에서 관광자원으로서의 편리성이 좋아진다는 장점과 원래 모습이 아니게 된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한국의 지형과 역사에 맞게 발전한 한국의 성곽건축은 일본의 성과는 다릅니다.)
마지막으로 일본성과 한국성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해보고싶습니다. 인터넷이라는 매체의 특성상 어떠한 것의 일부분만 편집되어 보거나 잘못된 정보를 보고는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본의 성과 한국의 성을 비교한 글을 보았는데, 단순히 형태만을 보고 일본의 성을 유럽의 성과 비슷한 건물형태의 성인데, 그에 비해 우리나라의 성은 성곽건축으로 담벼락과 같은 모양이다. 따라서 일본이 우리나라보다 우월하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제 생각에 이런식의 단순비교로 두 나라의 성을 비교하고 의도적으로 우리나라의 건축물을 비하하는 것은 매우 좋지않은 인터넷의 단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우리나라와 일본의 성곽건축은 역사적, 지형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첫번째로 역사적인 이유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한반도에 비교적 적은 나라가 자리잡았으며, 고려이후로는 단일국가가 자리잡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성은 주로 외세를 막기 위한 넓은 범위를 수비할 성곽 건축이 필요했습니다. 그에 비해 일본은 전국시대때까지 계속하여 가문중심의 봉건주의 사회가 이어지면서 수많은 세력이 기반 지역을 중심으로 끊임없는 분쟁을 했었습니다. 따라서 넓은 지역을 방어하기보다는 주민이 사는 지역을 중심으로 장군과 무사계급이 전투를 치르고 방어를 할 수 있는 형태의 성이 효과적이었습니다.
두번째로 우리나라는 산이 매우 많은 지형으로, 방어에 있어서 산을 이용한 성곽건축물을 통한 방어가 매우 효과적입니다. 이에 우리나라 성곽건축은 산을 넓고 긴 성곽으로 둘러싸 외세를 방어하기 유리하게 만들어졌습니다. 일본은 위에서도 언급했듯 넓은 지역을 외세를 막기 위한 방어시설이 아니라 인접한 지역간의 전쟁이 많았고 각 가문의 영토의 변화가 매우 잦았기 때문에 각 가문의 수뇌부를 지키고 전투를 할 수 있는 성건축이 더 유리했습니다.
이러한 차이 때문에 한국과 일본의 성은 전혀 다른 형태로 발전하였습니다. 두 나라의 성건축이 각각 장단점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단순히 형태만 보고 어느 한 나라의 성이 훨씬 우월하다고 하는 짓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나라의 건축물이 각각의 장단점이 있으며 각 나라에 알맞게 발전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이상으로 2번째 이야기를 마치며 세번째는 오사카성에서 열린 3D일루미네이션을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3번째 이야기는 짧고 지금까지의 이야기보다는 조금 가볍고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을 것 같네요.
'Special Article > 일본 건축기행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08 신사에서 태어나서 절에서 잠들다 (1) | 2014.11.06 |
---|---|
07 난바파크스 -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 (2) | 2014.11.05 |
06 신나는 건축 (1) | 2014.11.05 |
05 간사이의 현대건축 (2) | 2014.11.01 |
04 오사카 주택박물관과 신세카이를 통해 보는 오사카의 역사 (2) | 2014.10.28 |
03 오사카성 3D 일루미네이션, 건축과 프로젝션 맵핑 (1) | 2014.10.28 |
01 간판천국 도톰보리를 걷다. (2) | 2014.07.01 |
전진석의 간사이 건축여행 에세이 00 프롤로그 (2) | 2014.06.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