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에서 이어집니다.
이상화 고택
서상돈 고택
계산성당을 지나면 민족시인 이상화선생의 고택과 민족운동가 서상돈 선생의 고택을 만날 수 있다. 두 선생은 대구출신의 훌륭한 민족 운동가이다. 일제 순사는 이상화 선생의 시에 우리 민족이 영향을 받을 것을 걱정하여 선생의 원고를 모두 압수했다. 이상화 선생은 항일시인으로 활동했지만 이 고택에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본인의 시집을 하나도 내지 못했다. 서상돈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보부상을 시작해 큰돈을 벌었으며 장사꾼으로도 청렴한 선비로도 교육가로도 훌륭한 분이었다. 국채보상운동을 일으킨 분으로 선생 또한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마주보고 있는 두 채의 고택에서 훌륭한 두 선생의 생을 느끼고 배울 수 있다.
서상돈 고택 바로 옆에 위치한 고층 아파트
이상화 선생과 서상돈 선생의 고택에서는 조금 재밌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한 광경을 볼 수 있다. 바로 고층 건물들 사이로 두 채의 고택만이 그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두 고택을 둘러싸고 고층 건물과 상가들이 위치하며 그로인해 두 고택이 마치 숨어있는 듯 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실제로 두 고택도 함께 철거되고 현 위치까지 고층 건물이 들어올 예정이었다. 하지만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반대운동과 후원을 통해 이상화 선생과 서상돈 선생의 고택을 지켜냈다고 한다. 무분별하고 실익이 남는 개발만이 가속화되는 현대사회에서 두 선생의 정신적 가르침과 역사를 지닌 건축물을 보존하기 위해 시민들이 직접 발 벗고 나섰다는 점이 굉장히 감동적이었다.
계산예가
이상화 고택 바로 앞에는 계산예가라는 곳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은 근대 건축 유산을 찾은 관광객들이 쉬어가며 공부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체험 전시관이다. 이곳에서 항일운동의 역사들 대구 근대사회의 모습 등을 체험할 수 있다.
구 제일교회 (현 대구 제일교회 선교관)
고택들을 지나 대구 약령시를 향해 걷다보면 구 제일교회를 만날 수 있다. 청라언덕에서 만났던 제일교회의 구예배당이다. 이곳은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30호로 지정된 곳으로 대구 경북 지방 최초의 기독교 건축물이다. 1898년 이곳에서 기와집 네동을 교회당으로 이용하면서 시작된 대구 경북지방의 기독교 역사가 시작되었다. 신도가 계속 늘어나자 1908년 서양 건축양식을 합작하여 새로운 교회당을 지었고, 1933년 현재 모습의 벽돌조 교회당을 신축하고 1936년 종탑을 세우며 현재 모습이 되었다. 1994년 청라언덕에 위치한 새 예배당으로 기능을 옮겨갔고 현재는 선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구 제일교회는 근대 고딕양식이 잘 나타나있어서 건축적으로 큰 가치를 가진다. 간결한 고딕양식을 채택한 건축물로 평면을 남북으로 긴 직사각형으로 계획하고 우측의 종탑을 둔 벽돌조 고딕 교회건축물이다. 뿐만 아니라 대구 경북지역의 첫 번째 기독교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역사, 종교적으로도 큰 가치가 있으며, 선교사들이 근대적 의료와 교육을 전개하던 거점으로 이용되던 곳이라 대구지역의 근대역사에서 떼레야 뗄 수 없는 곳이다.
진골목
구 제일교회를 지나 약령시를 따라 걷다보면 조선시대부터 유지되어온 전통적인 길을 만날 수 있다. 영남대로~종로~진골목으로 이어진다. 영남대로는 조선시대 전국 9대 간선도로 중 하나로 한양과 부산을 잇던 도로였다. 지금으로 치면 경부선 같은 곳인데, 많은 물류가 거래되었던 곳이며,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기위해 지나는 과거길로 유명하다.
대구에도 종로가 있다고 하면 신기해하는 사람이 많다. 대부분이 서울 종로를 떠올리지만, 종로는 수원에도 있고 대구에도 있다. 종로라는 뜻 자체가 종각이 있는 길이라는 뜻으로 각각 서울에는 보신각, 수원에는 여민각, 대구에는 댈구벌대종이 있다. 대구의 종로는 달구벌대종과는 조금 위치가 떨어져있지만, 이 종로를 따라 경상감영과 대구 읍성의 남문인 영남제일관이 있었으며 종로를 따라 걷다보면 달구벌대종까지 갈 수 있다. 신기한 점은 비슷한 역사를 지닌 지역은 비슷한 모습으로 발전하는 것을 여러 도시등을 통해 알 수 있는데, 대구 종로에서도 그런 점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주먹들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야인시대’는 서울 종로를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거액의 현금들이 모이는 종로에는 자연스레 요정이나 기생의 권번들 같은 유흥시설들이 있었다고 묘사되곤 한다. 대구의 종로도 마찬가지다. 대구 최대의 번화가였던 종로도 야인시대에서 묘사되던 종로처럼 근대에는 요정과 같은 유흥시설들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한다.
정소아과의원
종로를 지나면 대구 진골목과 만나게 된다. 진골목 또한 조선시대 때부터 유지되어오던 골목길로, 전통적으로 대구지역의 유지들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현재는 100m정도 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원래는 훨씬 길었으며 이 골목에 대구 최고의 유지인 달성 서씨 일가, 코오롱 창업자 이원만, 금복주 창업자 김홍식등 내로라하는 유지들이 이 골목출신이다. 현재는 전통적인 다방의 원형을 지키고 있는 미도다방과, 1937년 지어진 민간 최초의 서양식 주택이었던 정소아과의원이 남아있다.
특히 정소아과 의원은 매우 중요한 근대 건축 유산이다. 우선 앞서 설명했듯 민간 자본으로 지어진 대구 최초의 서양식 주택이며, 1947년 정필수 원장이 매입하여 주택을 병원용도로 사용한 특이한 주택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일제강점기, 6.25전쟁 등 격동의 시기를 보내면서도 형태를 거의 완벽히 유지하고 있어서 당대 주거문화와 건축양식을 연구할 수 있는 훌륭한 문화재로 남아있다. 김원일의 소설 ‘마당깊은 집’은 이 부근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정소아과 의원에 대한 묘사가 자주 등장한다.
화교협회 및 화교소학교
진골목을 지나 걷다보면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곳은 화교소학교이다. 대구 중구 골목 투어 2코스의 마지막 목적지로 근대에 들어 대구에 정착한 화교들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화교들은 근대에 포목업과 건축업을 하며 대구에 자리 잡았으며, 경제적으로 부유해지자 화교협회를 세우고 이곳에 화교 어린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화교소학교를 세웠다. 대구 속에서 이곳만은 한국이 아닌 중국에 온 듯 한 착각을 일으키며 이국적인 인상을 강하게 준다. 80여년이 지난 건물이지만 보존상태가 좋고, 화교들이 자리 잡은 곳이라는 역사적 가치가 있어 화교소학교도 근대 건축물 등록문화재 252호로 등록되어 있다.
청라언덕에서 시작해 화교소학교까지 걷다보면 대구 근대 건축물과 근대사를 직접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다. 대구는 6.25전쟁당시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기 때문에 근대 건축물들이 매우 온전히 보전되어 있는 편이다. 중구 골목 투어 코스대로 따라 걷다보면 자연스레 대구 근대역사와 건축물들이 쌓아온 세월의 흔적들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다. 만약에 대구에 가게 된다면 꼭 한번 직접 가보길 추천한다. 이상으로 대구의 근대건축물 소개를 마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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