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교포 건축가 유동룡(庾東龍, Itami Jun, 이타미 준, 1937~2011)






재일교포 건축가 유동룡(庾東龍Itami Jun, 이타미 준, 1937~2011)


 

이타미 준은 1937년 도쿄에서 태어나 여행과 예술가들과의 만남을 통해 건축에 입문하게 된다. 이타미 준은 젊은 시절 건축보다 그림이 좋아해 화가가 되려고 했으나 장래를 생각해 건축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1964년 무사시 공업대학(도쿄도시대학) 건축학 학사를 졸업한 후, 1968IRM 건축연구소를 설립했다 이때 처음 한국에 들어왔다가 한국의 고건축과 민화, 자기에 매료 되었다고 한다그는 1970년대에 한국 민화를 일본에 소개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2003년 프랑스 국립 기메미술관에서 일본인의 한국 건축가라는 이름으로 개인전을 열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2005년 프랑스 예술문화훈장인 슈발리에를 수상했고, 2001년 금토동 주택으로 한국건축가협회상, 제주 미술관 프로젝트로 2006년 김수근 문화상, 아시아문화환경상을 받았다.






 “내가 미술과 건축 가운데 있고, 그러다 보니 미술도 건축도 잘 보인다. 그것은 내가 한국인과 일본인 가운데에 있는 재일교포와 같은 것이다.”라고 말한 이타미준은 아이러니한 경계 속에 있었던 것 같다.



그의 고향이였던 시즈오카의 시즈미에서 바라보았던 바다와 비슷한 그의 마지막 프로젝트 장소였던 제주도를 재일교포였었던 그가 제 2의 고향 이라고 할 정도로 한국을 좋아했고, 비록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에 정신적 뿌리를 두고 있다. 예로 그의 아틀리에인 <먹의 집>은 조선시대 사랑방 개념을 도입한 건물이다.


 



이타미 준은 사람을 자연보다 하위의 존재로 생각했고, 건축물 자체를 잠깐 자연위에 놓는 물건으로 생각했다. 사물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지닌 그는 만지고 그리는 신체감각을 매개로 건축을 익히고 표현했다

이타미 준은 조형의 순수성과 소재 자체를 강조하며 날것의 감각이 돋보이는 무겁고 원시적인 건축을 추구하였으며, 말년의 제주도에서 작업한 건축물들은 그의 건축의 원숙미를 보여준다. 이타미 준의 스케치를 보면 그가 자연을 얼마나 중요시 했는지 알 수 있다.



 이타미 준의 건축은 초기에 모노하[각주:1]의 문제의식을 공유 하고 있다. 의식적으로 흙, , 금속, 유리, 나무 등의 소재를 콘크리트와 대비 시켜 서로간의 조화와 대립을 꾀하였다. 재료의 언어를 이용해 이타미 준은 건축에서 생생한 사물의 감촉을 조형적으로 표현했다.

1980년대 이후에 일본은 유리와 철을 이용한 가벼운 건축이 주를 이루었는데, 이타미 준은 이를 현대 건축에 본질적인 무언가가 결여된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체온과 건축의 야성미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돌을 중심으로 목재, 대나무 등 자연 소재를 이용해서 무거운 건축을 추구 하였으며, 토착 재료들을 사용하려 함으로써 건축의 원시적인 형태에 의미를 두려고 했다. 1990년대 후반에서야 건축이 자연과 대립하면서도 조화를 추구해야하고, 공간과 사람, 자신과 남을 잇는 소통과의 관계에 중점을 두게 되면서 원시적 감각이 돋보였던 건축에서 온화하고 고요함이 드러나는 작품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제주 프로젝트에서 그의 마지막  감각을 볼 수 있다.





지금 이타미 준은 한국인 기준으로 재일교포이자 일본인 건축가로 보여진다.

자신이 한국의 피가 흐르는걸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유동룡, 나중에 포털에서 유동룡이란 이름으로 검색해도 그의 작품들이 보여지길 바란다.











  1. 모노파 로도 불린다. 1968년 일본 작가 세키네 노부오가 고베의 한 공원에서 땅을 파낸 뒤 그 흙으로 원기둥을 표현한 작품이 모노하 운동의 시작이였다. 이우환(한국의 세계적인 화가이자 조각가, 대구 두류공원에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이우환과 그 친구들 미술관’이라는 콘셉트로 건물을 짓고 있다고 한다)이 이론적 배경을 제시하면서 세계적인 미술사조로 자리 잡았다. 인공적이지 않은 사물을 이용해 창조보다는 관계성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모노하 라는 이름이 붙었고, 당시 모더니티에 대한 비판적 흐름과 맞물리며 주목 받았다. [본문으로]